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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정지연이 만난 사람 – 039. ‘꽃’의 사장 미자

DIKARCHIVE 2023. 3. 31.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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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출처 : https://street-h.com/magazine/45404/?ckattempt=1 \

 

우리 미자씨는 유쾌하기도 하지

15년 지켜온 ‘꽃’의 사장

 

하루가 멀다 하고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느라 바쁜 홍대앞. 탐욕에 눈먼 건물주 때문에 멀쩡한 가게를 문 닫는 사연이 속출하는 요즘, 15년 가까이 한자리를 지키며 버텨온 공간이 있다. 와우교 밑에 자리잡은 ‘꽃.’ 일주일에 문 여는 날은 겨우 사나흘. ‘내킬 때만 연다‘는 독특한 철학을 가진 꽃의 미자(본명 장미진)씨가 사는 법.

 

 

와우교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바로 옆에 빌딩 하나가 서 있다. 간판도 없는 그 빌딩의 지하에 꽃이 있다. 문을 열면 생각보다 가파른 계단에 놀라게 되고, 온갖 포스터가 붙어 있는 벽이며 마른 쑥 냄새가 감도는 아늑한 토굴 분위기에 얼른 자리에 앉고 싶어진다. 생각 외로 층고가 높은 데다가 퀴퀴한 지하 특유의 냄새나 습기가 적다. 무엇보다 공간을 때리는 것 같은 감도 높은 사운드가 죽여준다. 밥 말리의 ‘Redemption Song’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면 공간의 수런거림마저 장관이 된다.

 

15년 된 홍대앞 술집 꽃이다.

 

주인장 미자씨는 “꽃을 LP BAR로 소개하는 건 아니지?”라고 걱정부터 했다. 당연하다. 꽃을 촌스럽게 LP 바라 불렀다간 이곳의 단골들에게 몰매 맞기 딱 좋다. 벽면에는 각종 포스터와 그림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가장 오래된 건 밥 말리 포스터 옆에 붙어 있는 낡은 붉은색의 벽보. ‘끝과 시작’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데 1998년 꽃이 오픈한 그해의 마지막 날, 이곳에서 진행했던 공연 포스터다. 그 외에도 97년 6월에 열린 10만원 비디오 영화제 포스터, 인디 다큐 페스티벌 포스터 등이 보인다. 벽면이 곧 역사다. 꽃의 역사요 홍대앞 문화예술인들의 이력이자 활동의 기록이다.

 

이곳의 모든 물건은 미자씨가 직접 만들었다. 나무를 구해다가 테이블, 선반과 탁자를 못질해 뚝딱뚝딱 만들고, 스케치북 크기의 나무로 된 안주판도, 나막신 모양의 재떨이도 그가 직접 자르고 파고 그려 만들었다. 쌀포대를 잘라 그 위에 그림을 그려넣고 박음질해 만든 방석도 예술이다. 미술대학 근처에도 안 갔다지만 예술적인 재주가 넘치는 그녀다.

 

꽃은 1998년 9월 문을 열었다. 지금도 홍대 정문에서 산울림소극장 너머로 이어지는 길은 서교동 중심부에 비하면 한산한 편이지만, 1998년엔 더 그랬다. 미술학원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다. 커피프린스 골목도 휑하던 시절이었다. 대체 미자씨는 이곳에 어떻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일까?

 

“아는 사장님이 1994년에 ‘오픈하니까 와라’ 하고 연락을 줘서 처음 가보게 됐지. 그 사장님이 1년 하고 나가고 다른 이가 이어받아 3년인가 했는데 그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자리가 났다길래 내가 이어받은 거지. 걱정? 망해서 나갈 거라는 생각은 절대 안했어요. 대박이 나지는 않겠지만 망하지도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지.”

 

그때 나이 스물여섯. ‘10만원 영화제’ 스태프로 일하던 지인이 소문을 내면서 인근의 영화아카데미나 영화인들이 많이 찾기 시작했고, 이어 문화예술인들, 음악가들이 하나둘 몰려들면서 이곳은 어느새 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마침 심야영업 규제가 풀리면서 덕을 봤다. “쌈지 스페이스 생기면서 사람이 더 많아졌죠”라는 9년차 단골 차유진(셰프, 요리작가)의 말마따나 김종휘, 안이영노 같은 인디 평론가들이 들락거리던 시절도 그 무렵이었다. 이들이 꽃을 찾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겠지만 그 모든 건 음악으로 수렴되었다.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지. 스물 한 살 때부터 판을 틀었던 거 같애. 신촌 놀이하는 사람들이나 홍대 올드락을 오가며 음악 많이 틀었지. 신촌과 홍대를 왔다갔다 했어. 그때만 해도 신촌이 훨씬 인간미 넘치고 좋았거든. 올드락 사장님이나 그때 술집 사장님들이 다 디스코텍 디제이 출신들이라 잘 알거든. 내가 음악을 틀면 아저씨들이 밝은 노래를 틀어도 슬프대. 음악에서 (약)냄새 난다는 말도 들었어(웃음). 나, 그때 암것도 모르는 스무살이었는데.”

 

음악에 대한 열정은 단지 판을 트는 데 멈추지 않고, 밴드로도 이어졌다. ‘버스 라이더스’는 여러 명이 거쳐간 밴드인데 그녀는 여기서 보컬로도 활약했다. 멤버 중 알 만한 이들을 꼽아보자면 김반장(윈디시티), 림지훈(펑카프릭), 복철(에스콜라 알레그리아) 등 쟁쟁하다. 버스 라이더스는 탄탄하고 소울 넘치는 음악을 하던 레게밴드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카바레 제작 CD ‘안녕하세요 카바레사운드입니다’에 수록된 ‘Drive Reggae’란 곡에서 만난 그녀의 목소리는 묘하게 중성적이고 걸죽하면서도 리드미컬했다. 레게, 보사노바, 삼바 같은 남미음악에 빠지면서 그는 복철의 제안을 받아 ‘홍대앞 삼바학교’ 에스콜라 알레그리아의 창립 멤버로 함께하기도 했다.

 

“그게 2006년 무렵이었지 아마. 복철의 꼬임(?)에 넘어간 게. 한 6~7년 정도 하니까 딴 걸 기웃거리고 싶어졌던 거 같아. 그래서 영화미술하는 친구에게 꽃을 맡기고 막 돌아다녔지.”

 

사실, 가게 사장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건 그 ‘붙박이성’이다. 사람도, 공간도 시간이 흐르면서 재충전이 필요한 셈인데 주인이 공간의 아우라를 좌우하는 가게의 특성상 쉽게 자리를 비우기가 어렵다. 그러나 미자씨는 그런 점에서 자유로웠다. 자신과 색깔이 비슷한 친구에게 맡기고 2008년 1월에는 긴 여행도 떠났다. 마침 착잡한 선거결과까지 이어져 떠나는 발걸음엔 미련이 없었다. 목적지는 남미음악의 본산지 브라질. 브라질 친구 산드라의 집에 머물면서 볼리비아, 페루까지 돌겠다는 게 본디 계획이었다. 마침 단골이자 친구인 차유진도 중남미 여행을 계획하고 아르헨티나 쪽에 머물고 있던 터라 브라질에서 도킹하기로 약속까지 다 짠 상태였다.

 

“볼리비아에 가려고 풍토병 예방주사를 4개 한꺼번에 맞았는데, 열흘 지났더니 눈에서 열이 나더라고. 하룻밤 자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열이 펄펄 나기 시작해서 40도까지 올랐지. 황열로 한 달 가까이를 앓아 누웠어요. 몸무게가 무려 7kg이 빠졌어. 비행기 탈 체력이 생기기만 기다려서 당장 돌아왔죠.”

 

그렇게 6월 귀국했다. 그리고 그해 9월이었다. 평상시처럼 늦게 일어난 미자씨는 부재중 전화가 엄청나게 온 핸드폰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언니 꽃에 불났다며…괜찮아?” 경황 없이 나오는 길에 그녀는 엉엉 울었다. 꽃에 가득한 LP가 녹아내렸을까봐, 공간에 깃든 추억이 모두 망가졌을까봐 걱정스러웠다. 도착해 보니 가게 앞엔 소방차가 가득했고, 환풍기 틈으로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철문을 뜯고 들어가 화재를 진압했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당시 4층 작업실에서 지내던 하림이 신고를 제때 해준 거지. 나중에 생각해보니 플라스틱 잔에 촛불을 담아둔 걸 끄지 않고 갔던 거더라고. 경찰서에서 피해액 규모를 묻는데, ‘아마도 만…원?’ 하는데 민망하대. 사실 전화기 녹아내린 거랑 여기 나무 좀 그슬린 거 빼면 큰 피해가 없었으니 정말 다행이었지.”

 

미자씨는 난장판이 된 가게를 치운 후 하얀 종이에 ‘예뻐져야지’라고 써서 없어진 문 대신 벽에 붙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영업을 재개했다. 사건사고가 많았던 2008년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그런데 꽃은 15년이 되도록 한결같다. 4,000원으로 통일된 맥주 가격도 그렇고 1,000원짜리 안주인 김이나 단골들이 흔히 ‘해물 3종 세트’라 부르는 기본 안주인 새우깡, 메인 안주이자 꽃에서 가장 비싼 북어(1만원), 쥐포 등의 가격도 여전하다. 폭등하는 임대료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정든 장소를 떠나야만 하는 사연들이 넘쳐나는 이 홍대앞에서는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우리 주인 아저씨는 정말 귀여우셔. 그냥 우린 계약서 다시 쓰는 법도 없이 여기까지 왔어요. 세를 올린다는 개념보다 수도세 조금 올랐다 그러면 알아서 더 내고, 그런 식이었죠. 스물여섯 때부터 봐온 날 딸내미처럼 여겨주시는 거 같고요.”

 

관계란 일방적이지 않은 법이다.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건물주 아저씨는 가게 앞에 버려진 자전거만 봐도 미자씨에게 와서 손님이 두고간 건 아니냐, 자물쇠가 안 채워져 있던데 누가 가져갈라 일일이 일러주신다. 미자씨도 허물없이 대하되 주인 아저씨 내외를 살뜰하게 챙긴다. 자녀들이 미국에 있어 적적하실까봐 어버이날 카네이션 바구니와 선물을 들고 찾아뵙는 것도 알아서 한 지 꽤 됐다. 더운 복날이면 큼지막한 수박 한덩이도 챙겨 드린다. 윗집 아랫집 울타리 없이 살던 시절의 정 같은 게 주인과 세입자 사이에도 있다는 걸 이들은 보여준다.

 

“근데 사실, 요즘은 걱정돼. 바로 옆에 가게 생겨서 공사하는 것도 그렇고. 와우교 밑에 공원 조성이 완료되면 사람이 더 몰려들 거 같기도 하고. 아휴… 난 사람 많은 거 싫어. 더 있어 봐야 골치 아파.”

 

일주일에 한 사흘 열까? 그것도 단골이 전화해서 “언니, 문 안 열어?” 해야 문 여는 사장. 장사가 잘 되는 게 싫다는 이상한 사장. 잡지에서 홍보하자고 인터뷰하자면 손을 내저으며 싫다고 하는 사장. 노래만 틀어두고 잠시 나가 놀다 와도, 손님들이 알아서 술도 꺼내먹고 음악도 틀고 계산까지 하고 가는 이상한 가게. 누군가는 프로답지 않다고 질책하거나 얼굴 찌푸릴 법도 한데 미자씨는 당당하기만 하다.

 

“요즘은 검색 같은 걸 하는지 처음 보는 애들이 와서, 워메~ 구석에서 막 게임 같은 걸 해. 술 먹고 토하는 게 진상이 아니라 여기선 그런 애들이 진상이지. 또 어떤 친구는 와서 음악 소리가 너무 크니까 줄여 달래. 그럼 난 더 크게 얘기하시면 되죠라고 그래. 여기가 어떤 공간인지 알고 오는 사람들만 왔음 싶어. 돈 욕심? 없어요. 그냥 월세 낼 정도만 벌면 되니까.”

 

사실 꽃 손님의 불만 1순위는 ‘가게가 너무 자주 문을 닫는다’다 (그것도 단골들은 이골이 나서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거기에 대해서도 미자씨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억지로는 못 있는 법이잖아요. 몸이 안 좋으면 이 속 저 밑바닥에서부터 불친절이 올라오는데 내가 즐겁게 대할 자신이 없다면 닫는 게 맞지.”

 

손님이 왕이라고 생각하는 요즘 세상, ‘블랙 컨슈머’들이 들었다간 기절할 소리다. 그러나 미자씨는 그 공간을 만든 사장에 대한 존중이 먼저가 아니냐고 되묻는다. 세상 사람들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미자씨가 왠지 유쾌하다.

 

“‘넌 아직도 현역이냐?’ 하는데…. 왕년의 난다긴다하는 홍대 술집 사장들이 이제는 다 알바한테 맡기고 자리를 안 지키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아. 오래된 공간이라고 다 오래된 공간이 아니거든. 주인장이 없으면 그 공간에 어떤 색깔이 배겠냐고요. 직접 안 할 거면 차라리 문을 닫지. 남한테 맡기면서 계속 하는 건 욕심이죠.”

 

특별한 경영철학도, 노하우도 없다는 ‘천하태평’ 미자씨. 단골들은 애정을 담아 ‘생각 없이 버텨온 15년’이라고 놀리지만 미자씨는 생각이 많다. 다만 그 생각이 세간 사람들과 조금 다른 방식이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건 욕심 부리지 않고, 내 깜냥과 주제만큼 산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전히 019 폴더폰을 고집하는 아날로그적인 우직함은 세태에 빠르게 적응 못하는 못남이 아니라 자신의 속도로 세상을 버티는 지혜로움일 것이고, 손님을 늘리기보다 있는 손님을 지키겠다는 건 ‘수성守成’의 도다. 그래서 미자씨의 행보는 우보牛步를 닮았다. 느리지만 꾸준히 천리를 가고, 결코 실족을 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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